어떻게 죽을 것인가

  • Author
    Atul Gawande
  • Published year
    2015
  • Category
    Nonfiction
  • St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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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Highlights

현대 과학 기술은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사람들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더 나은 삶을, 더 오래 누리고 있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나이 들어 죽어 가는 과정은 의학적 경험으로 변질되었고, 의료 전문가들의 손에 맡겨야 하는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의햑계에서 일하는 우리들은 이 문제를 다룰 준비가 노랄울 정도로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러한 현실이 대체로 주목받지 못하는 까닭은 삶의 마지막 단계가 점점 사람들에게 친숙하지 않은 것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1945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대부분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1980년대에 이르자 이 비율은 17%로 줄었다.
내가 선택한 직업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때문에 존재하고 성공한 분야다. 해결 가능한 문제라면 우리가 그 방법을 알고있다. 그러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이 질문에 대해 적절히 답하지 못해 왔다는 사실이 걱정스럽다. 또한 그것이 냉담함과 몰인정함, 그리고 엄청난 고통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죽음을 일종의 의학적 경험으로 만드는 실험이 시작된 것은 10년밖에 되지 않았다. 역사가 짧은 셈이다. 그리고 그 실험은 실패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 고령은 더 이상 희귀한 현상이 아니다. 1790년에는 미국 사회에서 65세 이상 노인 인구의 비율이 2%도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14%나 된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에서는 이 수치가 20%를 넘는다. 중국은 세계 최초로 노인 인구가 1억 명을 넘어선 나라가 됐다. 노인들이 예전에 누렸던 지식과 지혜에 대한 독점적인 지위도 문자의 발명에서부터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통신 기술의 발달로 점점 설 자리가 좁아졌다.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직업을 낳았고, 새로운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에 따라 오랜 경험과 노련한 판단의 가치가 훨씬 퇴색되어 버렸음은 물론이다.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노인들에게 의지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구글 검색을 하고, 컴퓨터에 문제가 생기면 아이들에게 도움을 구한다.
영양, 위생, 의료 시스템이 나아지면서 1900년에만 해도 50세 미만이었던 평균 수명이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60세 이상으로 올라갔다. 가족 구성원 수도 현저히 줄어들어 1800녀대 중반에 평균 일곱 명의 자녀를 두던 것이 1900년 이후에는 세 자녀 정도가 됐다.
인류 역사상 나이 드는 일이 이보다 더 나은 시대는 없었다. 세대 간 힘의 균형이 재편되긴 했지만,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경우가 많았다. 노인들은 자신이 누렸던 통제력과 지위를 일부 나눠 주었지만 완전히 잃은게 아니었다. 현대화가 강등시킨 것은 노인들의 지위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였다. 현대화는 사람들에게-젊은이와 노인 모두에게-더 많은 자유와 통제력을 누리는 삶의 방식을 제공했다. 노인들에 대한 존중은 없어졌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젊음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독립적인 자아에 대한 존중으로 대체된 것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목표가 독립이라면, 그걸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노령은 진단명이 아니다. 사망진단서에는 항상 호흡부전, 심장마비 등의 사인이 들어가게 마련이지만 사실은 한 가지 병으로 죽음에 이르는 게 아니다. 의학의 힘으로 최선을 다해 여기저기 보수하고 기워 가며 유지를 하다가 신체 기능이 종합적으로 무너지게 되면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혈압을 낮추고, 골다공증을 완화하고, 이 병을 치료하고, 저 병을 주시하고, 고장 난 관절, 판막, 피스톤 등을 교체하면서 중앙 관제 센터가 서서히 쇠퇴해 가는 것을 지켜본다.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의 궤적은 길고도 느린 과정이 됐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 의학의 발전은 두 가지 혁명을 가져왔다. 하나는 우리 삶의 궤적을 생물학적으로 변화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궤적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문화적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10만 년에 달하는 인류 역사 중 최근 수백 년을 제외하면 인간의 평균 수명이 항상 30세 이하였다는 것을 잊지 말자. (로마 제국 신민의 평균 수명은 28세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늙기 전에 죽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는 얘기다.
몽테뉴Michel de Montaigne는 16세기 말엽의 사회상을 관찰하고는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노령으로 죽는 것은 드물고, 특이하고, 놀라운 현상이며, 다른 형태의 죽음보다 훨씬 부자연스럽다. 그것은 그야말로 마지막 남은 극단적인 형태의 죽음이다.” 그러니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평균 숨여 80세가 넘는 지금, 우리는 정해진 시간을 훨씬 넘어 살고 있는 특이한 생명체인 셈이다. 우리가 연구하는 노화라는 현상은 결국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기보다 부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새로운 인구 구조에 제대로 대처하고 있는 사회는 거의 없다. 우리는 여전히 65세에 은퇴하는 개념을 고수하고 있다. 65세 이상 인구가 아주 적은 비율이었을 때나 말이 됐지, 그 비율이 20%를 육박해 감에 따라 점점 유지하기 어려운 개념이 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사람들이 노후를 위해 저축해 두는 액수는 대공황 이후 최저 수준이다. 최고령층의 절반 이상이 배우자 없이 살고 있으며, 우리 대부분은 전례 없이 적은 수의 자녀를 두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우리는 노후에 혼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거의 생각을 하지 않는다.
85세 이상 운전자가 사망 사고를 낼 확률은 10대 운전자의 세 배가 넘는다. 고령 운전자가 도로의 가장 큰 위험 요인인 것이다.
“집이 없어질 거라면 나도 운명을 같이하겠소.” 그가 말했다. “이 집을 잃으면 어차피 일주일도 못 가서 나도 죽을 테니.” 초록색 존 디어 모자를 쓰고 버번 코크 칵테일 잔을 한 손에 든 채 직설적이고 괴팍한 어투로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트루먼 할아버지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지역 경찰은 할아버지의 안전을 위해 체포도 고려했지만, 결국 그의 나이와 여론의 비난을 고려해 포기했다. …”내일 죽는다 해도 참 괜찮은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봤고, 원하는 것도 다 누려 봤으니까." 화산은 190녀 5월 18일 오전 8시 40분에 터졌다. 원자 폭탄과 맞먹는 위력이었다. 용암이 흘러내려 호수 전체를 뒤엎었고, 트루먼 할아버지와 고양이들과 집도 함께 묻혔다. 해리 트루먼은 자기 집에 끝까지 남아서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긴 채 자기 방식대로 삶을 살다 간 사람으로 기억됐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사라져 버린 시대에 큰 의미를 남긴 것이다. 인근 캐슬록 주민들이 해리 트루먼을 기억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는 지금도 마을 입구에 서 있고, 아트 카니Art Carney가 주연한 TV 영화도 나왔다.
어느 요양원에서든 노인들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건 고사하고, 그들 옆에 앉아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 묻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 이것은 바로 삶의 마지막 단계에 관해 생각하지 않으려는 태도로 일관하는 사회가 낳은 결과다. 우리가 만들어 낸 시설과 제도들은 여러 가지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병원 입원실을 비우고, 가족의 부담을 덜어주고, 노년층의 빈곤을 극복하려는 목적 말이다. 그러나 그 시설에 들어가 사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듯하다. 우리가 병들고 약해져서 더 이상 스스로를 돌볼 수 없게 됐을 때도 삶을 가치있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 말이다.
만약 필요와 욕구의 변화가 나이 드는 것 자체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면 어떨까? 만일 이것이 그저 관점의 문제와 관계된 거라면, 즉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사적인 느김과 관련된 거라면 어떨까?
카스텐슨 교수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기초로 해서 하나의 가설을 만들었다.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어 하는지는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 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가설이다. 젊고 건강할 때는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믿는다. 가지고 있는 기능과 능력을 잃을까 봐 걱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세상은 네 손 안에 있다.” “마음만 먹으면 못 해낼 일이 없다.” 젊은이들은 현재의 즐거움을 기꺼이 뒤로 미룬다. 이를테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기술과 자원을 얻는 데 몇 년이고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그들은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더 큰 물결에 연결되고 싶어 한다.
'생명의 덧없음을 두드러지게 느낄 때’면 삶의 목표와 동기가 완전히 변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관점인 것이다.
“스스로는 자율권을 원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안전하길 바라는 게 인간이라는 거예요.” 바로 이 점이 노쇠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크고 역설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가 애정을 가진 사람에게 바라는 일들 중에는 정작 자신은 단호히 거부하는 것들이 많다는 거죠. 자아감을 침해하는 일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