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주는 기쁨

  • Author
    Alain de Botton
  • Published year
    2012
  • Category
    Nonfiction
  • St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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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Highlights

어쩌면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주는 것은 슬픈 책이고, 우리가 끌어안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을 때 벽에 걸어야 할 것은 쓸쓸한 도로변 휴게소 그림인지도 모른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관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받아 술술 진행되어 나간다. 해야 할 일이 생각뿐일 때에 정신은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 같다. 마치 남의 요구에 의해서 농담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말투를 흉내내야 할 때처럼 굳어버린다.
오스카 와일드는 휘슬러가 안개를 그리기 전에는 런던에 안개가 없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안개야 많았겠지만, 우리의 시선을 인도해주는 휘슬러의 그림이 없었다면 그 독특한 특질을 보는 것이 약간 더 어려웠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에 어떤 동지애가 이룩된다고 해도, 노동자가 아무리 선의를 보여주고 아무리 오랜 세월 일에 헌신한다고 해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지위가 평생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 그 지위가 자신의 성과와 자신이 속한 조직의 경제적 성공에 의존한다는 것, 따라서 자신은 이윤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감정적인 수준에서 늘 갈망하는 바와는 달리 결코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늘 불안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매수 슬픈 일이지만, 사실 우리가 현실에 눈을 감고 일에 대한 기대를 극단적인 수준으로 올려버릴 때와 비교하면 그 반도 슬프지 않다. 인생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는 확고한 믿음은 수백 년간 인류의 가장 중요한 자산 중 하나였다. 이것은 마음이 독에 물드는 것을 막아주는 보루가 되기도 했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희망의 길로 가는 발걸음을 막아주는 보호벽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근대적 세계관이 배양한 기대가 이 보루와 보호벽을 잔인하게 제거하고 말았다.
맞춤법은 시간이 가면 정확해지지만, 우리의 의도를 제대로 반영하도록 단어들을 배열하는 데는 꽤 고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나치고 어울리지 않는 것을 비웃는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왕, 능력이 권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왕을 비웃는다. 인간적 본성을 잊고 특권을 남용하는 높은 지위의 권력자들을 비웃는다. 우리는 비웃고, 비웃음을 통해서 불의와 과잉을 비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