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시대

  • Author
    Alain de Botton
  • Published year
    2014
  • Category
    Nonfiction
  • St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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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Highlights

온갖 이례적인 사건들을 이처럼 단호히 추적함에도 불구하고 뉴스가 교묘히 눈길을 회피하는 딱 한 가지가 있다. 그건 바로 뉴스 자신, 그리고 뉴스가 우리 삶에서 점하고 있는 지배적인 위치다. ‘인류의 절반이 매일 뉴스에 넋이 나가 있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언론을 통해 결코 접할 수 없는 헤드라인이다.
뉴스는 뉴스의 작동원리가 거의 보이지 않게 하는 방법을,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의문을 제기하기 어렵게 하는 방법을 안다. 뉴스는 추측으로 점철된 자신의 관점은 언급하지 않은 채, 별다른 억양 없는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뉴스는 세상사를 그저 보도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진 못하지만, 대신 지극히 뚜렷한 우선순위에 의거한 새로운 세상을 우리 마음속에 공들여 짓는 작업을 꾸준히 해나간다.
뉴스를 찾아보는 건 귀에 조개껍데기를 갖다 대고 거기서 들리는 인류의 울부짖음에 압도당하는 것이다. 뉴스는 우리에게 각기 할당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거나 흥미진진한 문제들을 찾아냄으로써, 그리고 이 더 큰 관심사들이 자기 자신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불안과 의심을 삼켜버리도록 용인함으로써 우리를 사로잡은 문제로부터 도피하는 탈출구가 될 수 있다.
이 모든 뉴스 기사들이, 예를 들어 중국이 부상중이고 중앙아프리카는 부패했으며 교육은 개혁되어야 한다는 등의 막연하면서도 놀랄 것 하나 없는 결론들의 퇴적물을 넘어서 우리의 지혜를 늘리는 데 얼마만큼 기여하는가?
오늘날 우리가 뉴스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장소는 지구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뉴스는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아침 일찍 일어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뉴스는 대륙을 오가는 비행기를 타고 우리를 따라온다. 뉴스는 자녀가 잠자는 틈을 타 우리 주의를 낚아채려고 대기중이다.
어떤 정보든지 관심을 유발하려면 그 정보를 ‘배치할’ 어떤 장소,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이미 알고 있는 쟁점에 해당 정보를 접속시킬 방법이 필요하다. 인간 뇌의 일부는 특정한 기초 범주에 따라 분류된 정보들이 꽂힌 서재로 묘사할 수 있다.
정작 문제는 우리가 더 많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접한 그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는 데 있다.
언론이 칭찬받을 만한 지점은, 사실을 모으는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그 사실들의 타당성을 알아내는 (지적 편향을 통해 갈고닦은) 기술이다.
사회가 전대미문의 복잡한 수준에 이른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성급하게도 모든 본질적인 사안들이 과감하게 요약될 수 있기를 기대하기에 이르렀다.
권력을 공고히 하길 소망하는 당대의 독재자는 뉴스 통제 같은 눈에 빤히 보이는 사악한 짓을 저지를 필요가 없다. 그 또는 그녀는 언론으로 하여금 닥치는 대로 단신을 흘려보내게만 하면 된다.
뉴스는 스스로를 현실을 그려내는 권위 있는 초상화가라고 제시할지도 모른다. 뉴스는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는 대단히 난감한 질문에 답을 갖고 있다고 주장할지 몰라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는 빼어난 능력은 없다. 뉴스는 어떤 이야기를 조명하고 어떤 이야기를 빼버릴지 선택하면서 단지 현실을 선택적으로 빚어낼 뿐이다.
여기에는 거대하면서도 대체로 파악할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다. 이는 시민들이 서로에 대해 갖게 되는 이미지를 조합하는 힘이고,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이들일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구술하는 힘이고, 우리의 상상 속에 한 국가를 건설하는 힘이다.
뚜렷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재앙에 절망하기 전에, 우리는 뉴스란 기본적으로 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설명하는 한 묶음의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뉴스가 제공하는 국가에 대한 소식들이 국가 그 자체는 아니다.
뉴스와 오래 시간을 보낼수록 몹시 익숙해지게 될 두 가지 감정은 두려움과 분노다. 뉴스는 이 세상에 두려워할 것들이 아주아주 많다는 사실 속에 우리를 분명하게 놓아둔다. 외계 물체, 돌연변이 바이러스, 사무용 가구, 과학기술…… 이외 수많은 재난들과 관련해 뉴스는 우리로 하여금 소심함, 공포, 나약함 중 하나에 확실하게 빠지도록 한다. 인류가 직면한 난관을 극복하고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미미하게 여겨진다. 습관적으로 뉴스 헤드라인을 따라잡다보면 아주 살짝 높아지기야 하겠지만.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기대 수준에 달려 있다.
우리가 기사 말미에 차마 공공연하게 노출할 수 없는 상소리를 댓글로 남기고픈 유혹을 느낀다면, 그건 뉴스가 사안을 둘러싼 문제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우리에게 제공하길 꺼리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논리적인 해결책들은 항상 순전히 어리석은 이들 때문에 무시되는 듯 보인다.
분노는 겉보기에 어떤 상황에 대한 비관적인 반응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세상이 지금보다는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한 징후다. 집 열쇠를 잃어버릴 때마다 소리를 질러대는 남자는 열쇠가 절대로 분실될 일이 없는 어떤 우주에 대한 아름답지만 무모한 믿음을 불현듯 내보이는 것이다. 정치가가 공약을 어길 때마다 분노하는 여자는 선거에 속임수가 개입돼서는 안 된다는 위태로운 유토피아적 신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사실이 언론의 억측과 절망스러운 보도의 절반 정도는 단박에 날려버릴 것이기 때문에 거의 모든 언론이 감히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정치의 핵심 영역에서 한 사람이나 한 정당이 단숨에 성취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뉴스는 범죄자가 경찰차 뒷좌석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우리와 우리 사회의 무수한 병폐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지금 막 확인되어 안전하게 제거되었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부정한 인물을 체포하는 것이 일정 기간 깊은 만족감을 줄 수는 있어도, 이것이 고취하는 희망은 잘못된 방향을 가리킬 수 있다. 설사 재벌 혹은 권력을 휘두르는 각료들을 죄다 감옥에 가둔다 해도, 국가는 여전히 해결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골치 아픈 문제들을 수없이 갖고 있을 것이다.
수치심이 정말로 인류 개혁에 가장 쓸모 있는 도구로 이용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우리는 모멸을 당하면 더 나은 인간이 될까? 두려움은 가르침을 줄까?
플로베르는 신문을 증오했다. 신문이 독자로 하여금 정직한 사람이라면 결코 타인에게 떠넘기는 데 동의하면 안 되는 어떤 임무를 그렇게 떠넘기도록 부추긴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 임무란 바로 생각하기이다.
우리는 전날 배포한 보도자료 외에 아무것도 덧붙일 게 없다며 난폭하게 내뱉는 수상의 한마디를 받아 적기 위해 정치부 기자가 브뤼셀의 유스투스 립시우스 빌딩• 출입구 차단벽 뒤에 선 채로 빗속에서 세 시간을 보내야 했던 일에 대해서는 거의 듣지 못한다. 혹은 우리가 점심때 샌드위치를 먹는 동안 별생각 없이 훑어보는 기사를 만들기 위해 북아프리카 특파원이 말리의 반군 집단을 따라잡느라 손에 땀을 쥐는 스물두 시간을 보낸 일에 대해서도, 놀라운 새 트렌치코트에 감탄하는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 여배우가 베벌리힐스의 커피숍에서 나오길 기다리느라 자기 인생의 많은 시간을 잃어버린 사진기자의 노고에 대해서도 거의 듣지 못한다.
우리는 콜로라도나 핀란드 북부에 위치한, 지저분한 석탄과 천연가스를 연료로 쓰는 데이터 센터에 500미터나 늘어서 있는 거대한 검은색 컴퓨터 서버의 빽빽한 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도록, 혹은 그걸 의식조차 못하도록 되어 있다. 그곳에는 우리의 가볍고 선명한 모니터를 통해서는 전혀 인지할 수 없는 음울한 물리적 현실이 있다.
탁자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제기했다면 우리가 보다 철저하게 검토하려 들었을 의견들이 특정한 언론사 이름 아래 있기만 하면 거의 신화적인 힘을 획득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계몽주의의 위대한 목표는 성취되었다. 이제 평균적인 시민들은 지구상 모든 국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접한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훨씬 놀라운 사실을 어쩔 수 없이 확인하게 된다. 아무도 그 사건들에 딱히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예술을 가장 실용적으로 정의한다면, 사람들의 머릿속에 개념들을 강력하게 심는 방법을 터득하려는 훈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철학이 지닌 문제는, 만약 우리가 특정 지역에서 일상적인 것으로 통하는 게 뭔지에 대해 감을 잡지 못한다면 비일상적 상태를 측정하거나 그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게 무척이나 어렵다는 점이다. 우리는 어떤 지역이 기본적으로 안정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걸 알고 있어야만, 또한 그곳 거주민들의 일상생활, 일과, 그들이 품고 있는 소박한 희망을 충분히 알고 있어야만 거기서 벌어진 슬프고 폭력적인 사태에 대해 정확하게 우려를 표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세상 대부분의 나라들에 관해, 뉴스 미디어의 경이로운 기술에도 불구하고, 또한 각 부서, 특파원, 사진기자들과 카메라맨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나라들의 일상적인 사건들에 대해서는 그게 무엇이건 간에 아무런 정보도 제공받지 못한다.
한 사회 안에서만 살다보면 우리의 특정한 문명이 주는 이점, 다시 말해 상대적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법률, 사회적 관습, 교육적 전통, 수송망 등에 대해 고마워하기는커녕 그것을 인지하는 것조차 잊어버리기 쉽다. 우리는 그걸 성취하기가 얼마나 지난했는지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어떻게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 속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쏟게 되는 것일까? 어째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걱정거리와 동떨어진 것에 귀중한 정신적 자원을 기꺼이 소비하는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이 작품이 겉보기에는 2000년 전 이탈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특정한 정치적 음모를 다루고 있어도, 실은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뉴스가 셰익스피어 같은 솜씨로 작성되길 기대할 수는 없지만, 보편적인 것에 대해 셰익스피어만큼 관심을 기울이라고 요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 특히나 어떤 특정한 사건이 어리둥절할 정도로 먼 나라 일처럼 보일 경우는 말이다.
우리가 다른 곳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구를 모두 잃은 건 아니다. 우리는 아주 예전에는 이른바 이국 땅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줄까지 섰던 생명체들이다. 문제는 현대의 뉴스 매체가 발전시킨 보도 방법론(다른 방법은 거의 모두 배제한 채, 정확하고 기술적으로 신속하지만 비인간적인데다 위기에만 초점을 맞춘 보도 방침)이 일종의 세계화된 배타적 편협함 속으로 잘못 빠져들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정말 많은 것들을 알지만 실제로 그에 대해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고, 잘못된 종류의 얕은 지식이 우리 호기심의 범위를 확장시키기보다는 좁혀버렸다.
이제 우리는 ‘이국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조심한다. 외국의 것을 이국적이라며 상찬하는 것은 위험할 정도로 촌스럽고 오만하며 어쩌면 인종주의적으로까지 보인다.
그렇지만 오늘날 이런 식으로 사적인 감정을 내비치는 서술자는 보도의 객관성을 침해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따라서 해외 뉴스는 그 어떤 목소리나 개성을 가지고 소식을 전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건에 대해 솔직하게 표현하는 특파원의 왜곡된 렌즈를 통해 다른 나라를 접하는 것이 시청자들에게 제아무리 해가 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이는 외국의 그 어떤 일에도 단순히 반응하는 것조차 은연중에 거부함으로써 세상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은 우리의 욕망을 치명적으로 손상시키는, 겉보기에는 중립적이고 정확한 기자들이 생산한 숨막히는 지루함에 비견할 바는 못 된다.
나는 내가 세상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지금껏 셀 수 없이 많은 사진을 보고 수많은 출판물들을 읽었음에도 우리 행성 위에 존재하는 나라들 대부분에 대한 내 심상이 기껏해야 하나 정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숫자들은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만들기도 한다. 경제지표로 한 국가를 평가하는 것은 혈액검사 결과를 통해 어떤 사람을 다시 그려보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수많은 희망을 단호하게 묻어버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한편에는 거대한 규모의 풀기 힘든 숙제들과 씨름하는, 고도로 복잡한 사회과학의 성과에 대한 보도로 점철된 뉴스 의제가 있다. 이 뉴스는 주기적으로 비관적이고 체념한 듯한 보고를 전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불완전하고 순진하고 순수하고 열정적이지만 강력한 이런저런 소망이 있다. 이 소망은 어른스러운 진지함과 체면이 손상될까 두려운 나머지 조심스레 감춰두고 웬만하면 언급하지 않는 것들이다.
경찰과의 싸움이 있은 지 몇 주 뒤, 임시로 만든 천막은 철거당하고 뉴스는 다른 보도를 계속 진행한다. 이런 폭발은 치명적인 순진함으로 인해 실패한다. 즉, 문제적인 상황을 개선하려는 가장 선한 의도가 문제를 일으킨 원인에 대한 효과적이고 사법적인 지식과 결합하지 못함으로써 폭발은 사그라지고 마는 것이다.
뉴스라는 렌즈를 통해 보게 되는 경제 ‘논쟁’은, 대중의 기대와 무엇이 가능한가에 대한 대중의 감각 모두를 엄격한 통제선 안에 가두고 그 밖으로 넘어서지 못하게 한다. 누군가 그런 의제에서 벗어나려 하면(예를 들어 주주란 무엇이고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보자고 하거나 성장과 복지의 상관관계에 의문을 품는다거나 하면) 갑작스레 ‘급진적’이라 간주되고 따라서 우습게 여겨지고 만다. 우리가 오늘날 당연히 여기는 것들 대부분(최저임금, 아동 보호, 환경 정책)이 처음에는 미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완전히 급진적으로 보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돼 ‘합리적인’ 의견으로 정착된 것인데도 말이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오로지 경제 용어로만 작성하거나, 회사 전체를 +1.20이라고 요약하거나, 직원 8000명의 직장생활을 총매출 375.776으로 압축하는 행위들은 마치 『오만과 편견』처럼 복잡한 소설을 등장인물들의 은행계좌 원장으로 간단히 정리해버리는 것과 같이 한계가 명확한 일이다
기억해야 할 것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이 제품들은 (당연히) 무척 싸지만, 그건 찬쿤 실업이 엄청 대단하거나 똑똑해서가 아니고, 또한 현대 기술이 굉장히 기발해서도 아니라는 것이다. 제품 가격이 싼 근본적인 이유는, 경제학자들이 ‘가격결정권 결여’라고 점잖게 표현하지만 절망이라고 규정짓는 것이 더 솔직하게 느껴지는, 샤먼 시 노동자들을 처절한 고통 속에 몰아넣은 노동 조건에 있다.
직업이 의미 있다고 느끼는 건 언제일까? 하루가 끝날 무렵, 내 일이 어떤 면에서는 미약하게나마 타인의 비참함을 줄이거나 만족감을 늘리는 데 도움을 준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우리는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싶어하고, 나아가 동료 인간들의 삶에 우리의 활동이 미친 영향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노동이 무척이나 자잘하게 세분화될 때, 혹은 타인의 안녕에 극히 짧은 순간만 영향을 주거나 아예 그럴 일도 없을 물건을 만드는 데 경력 전체를 바칠 때, 노동의 의미는 악화돼버린다.
자신만의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위업을 다룬 뉴스가 주는 심리적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쭉 뻗어나가야 한다. 뭔가 가치 있는 것, 다시 말해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시샘을 받게 될 만한 일을 해내려면 내면으로 침잠해들어가는 고요한 은둔의 시간이 필요하다.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의 핵심에는 감동적이면서도 연약하고 단순한 열망이 있다. 바로 제대로 대접받고 싶다는 바람이다. 돈, 호화로운 삶, 섹스 혹은 권력에 대한 욕망 같은 것들은 부차적인 자극제일 뿐, 존중받고 싶은 마음이야말로 유명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원동력이다.
전형적인 유명인사의 유년기에는 (거의 틀림없이) 거절의 경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 경험 없이는 명성에 대한 한결같은 희구란 있을 수 없다. 부모 중 한쪽이 그에게 무관심했거나, 그와 정서적인 교류를 하지 않았거나, 다른 형제자매에게 더 관심을 기울였거나, 그것도 아니면 일찍 죽었거나 해야 한다. 가장 심각한 예는 부모가 유명해지려고 애쓰는 사람이거나 이미 유명해진 누군가와 어울리느라 자기 아이에게 관심을 꺼버린 경우고, 이때 명성에 대한 욕구는 강박이 되어버린다.
10여 년 정도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사는 50여 년에 대처할 힘을 얻을 수 있다.
셀러브리티 문화의 진짜 원인은 자기도취적인 얄팍함이 아니다. 진짜 이유는 친절함의 부족이다. 모두가 유명해지고 싶어하는 사회는, 근본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여러 정치적 이유로 인해 평범한 삶을 살면서는 품위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구를 충족할 수 없는 사회다.
높은 고도에서 떨어뜨리는 폭탄처럼 희생자를 직접 볼 필요가 없을 때, 상처의 정도는 더 커지게 마련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실패하길 바라고 그들의 실수에 대해 험담하길 즐기는 건 결국 무척이나 슬픈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주목받지 못해 화가 나 있고, 그래서 우리 몫을 빼앗아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단죄함으로써 위안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좌절된 야망이 우리를 실패자로, 다른 이의 실패를 바라는 사람으로 만든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보바리와 햄릿을 보통의 범죄자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으로 승격시키고, 이들을 감옥에 갇힌 의사처럼 매몰찬 취급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걸까. 그건 바로 플로베르와 셰익스피어의 영혼이 지닌 관대함이다.
심각한 범죄 기록이 없는 건 대체로 운이 좋거나 환경이 좋아서일 뿐, 본성이 타락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어두움을 조용히 품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야망과 행복, 잘 풀리는 연애, 잘나가는 직업과 노력의 성공에 대한 이미지를 끊임없이 강조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데, 이중 대부분은 고통스럽게도 우리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균형잡힌 삶을 위해서는 내면과 외부의 관심사를 절묘하게 혼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타인이 겪은 사고를 통해 드러나는 일반적인 메시지(우리가 정말로 취약하고 일시적인 존재라는 것)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겪은 구체적인 경험에 너무 깊이 몰입한 나머지 낯선 이에게 닥친 재앙을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변명거리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뉴스가 늘 우리 앞에 갖다놓고자 애쓰는 슬픔과 고통을 명확히 인식하는 한편, 거기에 고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단순히 감정대로 행동하는 것을 인간다운 것이라 생각하는 데 워낙 익숙해서, 가끔은 무덤덤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 또한 인간이 필수적으로 획득해야 하는 능력이라는 통찰을 간과하기 십상이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인내심이 줄어들었고, 더 낙관적으로 변했다. 딱히 언급하지는 않지만 건강 뉴스의 저변에 깔린 미래에 대한 전망은, 언젠가는 과학이 죽음을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한 치료법을 발견하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전례없이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는 매년 3만 편의 영화와 200만 권의 책, 10만 장의 음반을 생산해내며, 9500만 명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는다.
우리는 수많은 책과 영화, 사진을 거의 즉시, 때로 저렴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든 기술적 발명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아찔할 정도로 넓은 범위의 작품들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과 그중 어떤 것이 우리에게 알맞은 작품인지 안다는 것은 무척 다른 문제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해외 뉴스는 다른 나라에 대한 알차고, 감각적이며, 가끔은 기자의 개인적인 견해도 첨가된 그 나라의 초상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보도의 중립성에 대한 집착을 저쪽으로 치워야 한다.
뉴스가 지배하는 시대에 온전한 판단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움과 중요함은 그 범주가 겹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서로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스크린 위에서 계속 변화하는 화소와의 접촉과, 제본과 서체로써 장래에 갖게 될 생각의 한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고 웅변하는 묵직한 양장본의 본문 페이지와의 접촉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뉴스가 더이상 우리에게 가르쳐줄 독창적이거나 중요한 무언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챌 때 삶은 풍요로워진다. 그때 우리는 타자와 상상 속에서만 연결되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타자를 정복하고 망가뜨리고 만들거나 없애는 일을 그만둘 것이다. 아직 우리에게는 할당된 짧은 시간 속에서 견지해야 할 자신만의 목적이 있음을 자각하면서 말이다.